“요약해줘”
이 한 마디면 며칠 밤을 새워도 다 읽지 못할 분량의 자료 몇 백 페 이지를 불과 몇 초 만에 완벽하게 정리해 준다. 챕터별 주요 논점 까지 짚어서 상세히 설명해 준다. 게다가 자료를 활용할 방향까지 세세히 알려준다. ‘내가 그동안 해 온 일이 뭔가’라는 생각에 마음 이 허무해질 정도다.
그뿐이 아니다. 광고주에게 제안할 광고 아이디어의 이미지를 만 드느라 쓰던 시간이 반의 반의 반 이하로 줄었다. 콘티를 그리거나 참조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라이브러리 이미지를 찾고 합성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만들고 싶은 이미지를 설명하면, 뚝딱 그림 을 대령한다. 아무리 수정해달라고 해도 짜증을 내는 법이 없다.
내 삶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는 생성형 AI의 이야기다. 오픈AI의 챗 GPT 열풍이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앤트로픽의 클로드, 구글의 제미나이가 함께 각축을 벌이며 발전하면서, AI들의 결과물이 눈 에 띄게 좋아졌다. 초기에 몇 번 만져보고는 ‘인공지능 아직 별거 아니네’라며 실망했던 사람들이,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라고 부르는 오류 가 줄어들고 급기야 AI 검색까지 선보이면서 인공지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양과 질은 물론 신뢰도도 급격히 높아졌다. 매체마다, 전문가들마다 AI 시대로 빠르게 진입하는 세상을 분석하고 전망 하고 있다.
요즘 나는 챗GPT, 클로드, 퍼플렉시티, 라이너, 미드저니 같은 AI 를 끼고 일하고 있다. 어느새 즐겨찾기 목록에 인공지능 폴더가 자 리 잡았고, 그 안에 수많은 사이트들이 연결되어 있다. 인공지능 목소리, 번역, 캐릭터, 트랜스크립션까지 합치면 10여 개의 AI 서 비스를 일상 업무에 사용하게 됐다. 업무 처리 시간은 빠르게 줄었 고, 할 수 있는 일의 양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압도적인 효율에 입 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쯤 되면 책도 한 페이지씩 넘겨 읽는 대신 AI에게 물어보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AI는 친절하게도 책의 내용을 빠짐없이 깔끔하게 정리해 줄 수 있다. 내용을 요약하고 해 석해 줄 뿐만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얻어야 하고 무엇을 느껴야 할 지까지도 알려줄 것이다.
10명 중 6명은 책 읽지 않는 시대
그렇잖아도 우리는 점점 더 책을 읽지 않는다. 통계는 이를 명확 하게 보여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국민독서실태조 사’에 따르면, 성인의 연간 종이책 독서율은 43%라고 한다. 우리 나라 성인 독서율은 해마다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10명 중 6명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상태까지 왔다.
드라마도, 영화도, 유튜브도 숏폼으로 즐기는 시대에 책을 읽는 일은 점점 더 과거의 유산이 될지도 모르겠다. 긴 시간 책과 씨름 하며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수고로움 대신 누군가가 뽑아 낸 핵심만 빠르게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효율적인 요즘식 생 활이 아니겠는가. 이런 시절이라 생각나는 카피가 있다.
읽는 행위를 다시 생각하다
人間は 本を?む動物である。
인간은 책 읽는 동물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대표적 출판기업인 신쵸샤(新潮社)가 내 놓은 카피다. 이 문장은 ‘상상력과 수백엔’이라는 슬로건으로 유 명한 ‘신쵸문고’의 책들을 소개하는 광고물에 실려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시대의 지성과 상상력을 만나보라는 문고판 도서들의 목록과 함께 이 카피는 광고 이미지를 좌우로 가르며 중앙에 단호 하게 자리 잡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대표적 출판기업인 신쵸샤(新潮社)가 내 놓은 카피다. 이 문장은 ‘상상력과 수백엔’이라는 슬로건으로 유 명한 ‘신쵸문고’의 책들을 소개하는 광고물에 실려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시대의 지성과 상상력을 만나보라는 문고판 도서들의 목록과 함께 이 카피는 광고 이미지를 좌우로 가르며 중앙에 단호 하게 자리 잡고 있다.
1987년판 TCC 카피연감에 등재된 이 카피는 1970~1980년대 일본 출판계의 분위기를 살짝 엿보게 해준다. 신쵸샤를 비롯해 카 도카와쇼텐(角川書店), 슈에이샤(集英社) 등 당시의 주요 출판사 들의 시리즈 광고물에는 유독 ‘성찰’이라는 주제가 자주 등장한 다. 광고의 이미지나 카피가 책을 ‘지성인들이 성찰하는 매체’로 표현한 작품들이 많다.
젊은 시절의 류이치 사카모토가 등장한 신초샤의 TV광고(1981) 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고독한 지성인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카도카와쇼텐의 1974년 광고의 카피는 ‘여행을 떠나는 한 권의 책’이다. 그런데 이미지는 즐거운 여행의 모습을 그리고 있 지 않다.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 고독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 이 조그맣게 드러나 있을 뿐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떠나는 외로운 여행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분위기에 정점을 찍는 것이 바로 ‘인간은 책을 읽는 동물’이라 는 신쵸샤의 카피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생각하는 동물(호모 사 피엔스), 유희하는 동물(호모 루덴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호모 파베르) 등 인간을 규정하는 다양한 정의가 있다. 이 카피는 그와 비견할만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책을 읽으며 길러진 지성은 인간 과 동물을 구별하는 잣대가 된다고 단언한다.
출판 광고의 분위기는 1990년대가 되면서 달라진다. 일본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과 함께 출판산업도 커져갔다. 광고 속의 책 이미지 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의 일부로서 자리하게 됐다. 더 이상, 독서가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기준으로 무겁게 의미 부여하지 않는 시대 로 접어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쵸사의 카피는 광고적으로는 그 소임을 다했다. 그러나, AI가 사람의 생각을 점점 대신하게 되는 시대에 다시 한번 그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시각을 통해 기호를 뇌가 인식하여 정보를 취 득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보가 들어와서 이를 처리하기만 하는 것이라면 AI 같은 기계가 더 잘하는 것이 당 연하다. 그러나, ‘읽는’ 것을 다르게 정의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읽는 행위를 다시 생각하다
‘읽는’다는 것은 책을 통해 들어온 정보가 나의 세계와 만나는 것 이다. 검은 글자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일이며, 저자의 숨결을 더 듬어가며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특별한 경험이다. 하나의 우주와 만나는 일이고, 다른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체험하는 일이며,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여정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는 느린 여정 속에서 우리는 생각하고, 상상하고, 공감하고, 성장한다.
어쩌면 AI 시대야말로 진정한 ‘책 읽는 동물’로서의 정체성이 더 욱 중요해지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AI가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처 리하고 분석해 주는 시대이기에, 역설적으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읽기’의 가치가 더욱 빛나게 된다. 느리지만 깊이 있게, 비효율적 이지만 창조적으로, 수고롭지만 인간답게.시간을 들여 읽은 책은 AI가 알려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 안에 남겨준다. 책장을 덮는 순간의 충만감, 그리고 읽은 이후에도 내 생각과 삶 속에서 살아 공명하는 이야기. 이것은 AI가 모든 책 을 대신 읽어준다 해도 바꾸기 힘든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이 글이 ‘책에 대해 사람이 쓴 구시대의 유물 중 하 나’로 발견되어 신기하게 읽히는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