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History] 시애틀 박람회(Seattle Exposition)와 한미흥업주식회사
20세기 초인 1909년 6월 1일부터 10월 16일까지 미국 북서부 시애틀에서는 박람회가 열렸다. 시애틀 박람회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알라스카-유콘-퍼시픽 박람회(Alaska-Yukon-Pacific Exposition)’라 한다. 미국 북서부가 모두 모인 박람회였기 때문이다. 이름이야 어떻든 이 박람회는 태평양 건너 조선에서 당시 최대의 광고주를 등장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Made in Korea’제품의 외국 박람회 출품 모집 초유의 광고가 되었다.
첫 광고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것은 1908년 12월 8일로서 당시 하루에 4면 발행, 1면이 7단이던 시절에 2단 광고를 게재했다. 광고주의 이름은 한미흥업주식회사(韓美興業株式會社). 주소는 전에 대한매일신보사가 있던 중부 전동. 다만, 우함(郵函) 제40호라 해서 우편함을 이용했다. 첫 광고이므로 해설을 달아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같은 광고를 계속해서 매일 게재하던 그 무렵의 관례에 따라 이 광고가 몇 차례 게재되고 난 뒤 1909년 1월 14일에는 이 회사가 하는 업무를 네 가지로 나누어 길게 설명한 광고가 나오는데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수제품을 미국에 수출하여 상업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 아울러 미국에서 들여다 파는 물건 값이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되어 비싸게 되므로 직수입해서 팔며는 값도 싸지며 많이 팔아서 이익도 늘어난다.
둘째, 미국 뿐 아니라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곳의 제품을 수입해 팔 것이므로 대리인이 판매하게 되고 또한 본사가 게재하는 광고를 통해 판매하는 여러 상황을 알 수 있다.
셋째, 부동산부를 설치할 것인데 자세한 내용은 뒤에 알리겠다.
넷째, 법률에 위반되지 않는 그 밖의 사업을 할 것인데 본사와 거래의 기본은 신용에 있다.
드디어 시애틀 박람회가 3개월 앞으로 다가오자 한글과 한문을 섞은 대대적인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1909년 3월에는 청수상람(請垂詳覽; 자세히 보십시오)를 오른쪽에 썼다. 가운데 전보(電報) 즉 뉴스라고 전했다.
4월 초에 이르자 이미 전국에 대리점 모집이 성공을 이룬 듯 전국 주요 도시에 28개 대리점과 이름을 적은 광고를 게재했다. 아울러 한문과 영어로 된 한미흥업의 회사 도장을 공개했다. 또한 한민흥업이 미국 애리조나 주법률에 따라 등록한 회사임을 밝혔다. (시애틀 박람회 관련 광고는 황성신문 -皇城新聞-에도 게재했다.) 그런데 대리점 결정 과정에는 더러 분쟁도 있은 듯했다. 한미흥업은 1909년 8월 초에 미국 의학박사 PAIN KILLER가 발명한 만병통치약 류의 제약 광고를 대한매일신보에 대대적으로 개시했다.
얼마나 많은 한국 제품을 시애틀 박람회에 출품했는가에 대한 설명은 찾지 못했으나 100여 년 전 한국 제품을 국제적인 박람회에 출품한다는 것은 놀라운 발상임에는 틀림없다. 무역진흥공사(KOTRA)가 생긴 것은 이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1960년대였다.
1908년 말에서 이듬해 8월까지 한국 최대의 광고주가 된 이 회사가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는 흥미진진한 연구거리일지도 모른다.
신인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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