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대홍기획 사보 편집부입니다. 핫크리에이티브 칼럼 의뢰 차 연락드렸습니다.” 바빠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둥, 애도 못 보는 판국에 무슨 놈의 글이냐는 둥, 접때도 쓰지 않았느냐는 둥 갖은 협박에 눈물로 호소해봤지만 다른 제작팀장들은 다 했는데 당신만 안 했다는 막판 펀치에 일단 하겠다고 한 다음 순간, 아득해졌다. 내게 의미 있었던 광고는 뭐였을까? 두서없이 떠오르는 광고는 많은데 막상 하나를 선택하려니 아~ 어려워!
글 ㅣ 권현선(크리에이티브솔루선4팀 팀장)
10여 년 전, 딴엔 카피 공부 한답시고 끼적거리던 카피 노트를 오랜만에 찾아 펼친다. 어느 영화 포스터에서 본 재미있는 문구, 신문에 스크랩해둔 기사며 잡지에서 오려낸 그림 쪼가리, 책에서 본 새로운 마케팅에 대한 글귀도 끼여 있다. 막내시절 잘하고 싶은데 뭔가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란 자신에 대한 울분, 턱없는 카피를 요구하며 말맛 타령만 해대는 AE에 대한 짜증, 팀장한테 깨지고 나서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며 쓴 글까지…. 나의 10년 전 일상이 좋은 글귀 속에 흉터만 남은 흔적처럼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광고밥 먹은 횟수만 늘고 직함만 바뀌었지, 고민의 수준은 어쩜 진보란 걸 모르는건지. 고독한 데 이유 없고 철 드는 데 나이 없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구나 쓴웃음을 짓다가 문득, 그 노트의 맨 마지막 장에서 이런 글 귀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한 당신은 女子다. 사랑하는 한 당신은 光고인이다.” 우웩! 이런 느끼하고 손이 오글오글 말리는 글을 내가 내 손으로 써놨다니…. 부끄러운 마음에 쭈욱 찢어버리려는 순간 마음이 이상하다.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걸 하고 있었던 거다. 남자를 사랑하듯 광고라는 것을 사랑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고 보면 인턴한다고 뛰어다니고 공모전한다고 깝죽대며 광고하고 싶어 안달을 하던 때가 있었다. 좋은 광고를 만나면 가슴이 쿵쾅쿵쾅 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렀고 그런 광고를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렵고 고단하고 피 말리는 일인지 알게 되면서, 그때 꿈꾸던 멋진 光고인이 더 이상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내 안에 그 두근두근하던 마음도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번에 소개할 광고는 ‘Diamond is forever’라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드비어스 다이아몬드 광고. 카피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워 신입 사원일 때 이 카피를 쓴 사람은 분명 천재거나 순 여자 몇은 울린 카사노바였을 것이라며 감탄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 읽으면 세월이 흘러서인지 좀 유치한 감도 없진 않지만, 일단 유명해서 가장 많이 알려진 카피 하나를 먼저 소개한다.
드비어스의 풀 네임은 ‘De Beers Consolidated Mines Ltd.’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다이아몬드 광산조합의 이름이다. 로맨틱한 광고를 생각하면 안 어울려도 한참 안 어울린다. 다이아몬드 제품이 아닌 원석 자체를 파는 공급 업체인 드비어스는 시장확대 차원에서 이 캠페인을 1980∼90년대에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결혼을 하거나 프러포즈를 할 때 다이아몬드는 광고하지 않아도 잘 팔린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 고가의 다이아몬드 제품은 수요가 높지 않은 것이 사실. 이를 위해 결혼 이후 출산, 10주년, 25주년 등 기념일마다 아내에게 또는 남편에게 다이아몬드를 사주라는 이 캠페인은 상술 자체가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여자의 가슴을 울렁울렁 뛰게 하는 힘이 있다.
기꺼이 한 달치 봉급을 고스란히 바쳐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고 싶은 열렬한 사랑의 표시인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나와 살아줘서, 내 아이를 낳아줘서, 나의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어서’ 늘 고마운 그녀에게 바치는 정(情)의 다이아몬드가 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은 뜨거운 두근거림의 사랑이 있다면 잔잔한 수면처럼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편안한 사랑도 있다. 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다 사랑이다.
지긋지긋한 야근과 갈수록 심해지는 백지에 대한 공포와 만날 앉아 있어서 생기는 뱃살의 압박.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는 회의의 연속이지만 나는 안다. 나는 이제 광고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뭘 봐도 광고적으로 보게 되고 뭔 말을 해도 광고로 귀결되며 이제 만나는 사람들도 광고쟁이밖에 없는 이 답답한 현실이 이제 내가 되었음을. 미우나 고우나 정으로 사는 부부처럼 나와 광고와의 관계도 이제 그 형태를 바꾸며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