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가 거닐던 곳에서 승마 선수들이 달립니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된 광장에선 스케이트 보더들이 묘기를 펼칩니다. 비치 발리볼이 날아다니는 하늘엔 에펠탑이 걸리고, 거대한 돔 아래 그랑 팔레에선 선수들이 펜싱 칼을 겨눕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왔던 아름다운 다리에선 사이클 선수들의 순위가 결정됩니다.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옆으로는 마라톤 선수가 달리죠.
24년의 여름은 파리 올림픽으로 뜨겁습니다. 에펠탑부터 시작해 베르사유 궁전, 센 강 등 사람들에게 선망의 여행지로 자리 잡은 파리. 파리는 이 자산을 영리하게 이용해 올림픽의 이야기로 만들었습니다. 개막식은 세느 강변에서 개최했고, 펜싱은 그랑 팔레에서 양궁은 앵발리드 광장에서 승마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일반 경기장을 벗어나 그들의 아이코닉한 장소를 모두 경기장으로 쓰고 있습니다. ‘파리’라는 장소를 스토리로 활용하고 있는 거죠.
물론 깨끗하지 않은 센 강을 철인경기 장소로 이용하는 등,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파리가 보이지 않는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대신, 파리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경기를 진행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마치 영화 촬영 장소를 훑듯 경기장이 등장합니다. 이토록 장소를 잘 활용한 적이 또 있었을까요? 파리는 올림픽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파리’를 내세웠습니다.
팬들이 만들어낸 스토리
데드풀과 울버린은 마블의 야심작으로, 수많은 매니악들의 기대를 모았습니다. 성격이 완벽하게 반대인 그들이 힘을 합해 싸우는 이야기는 이미 팬들을 흥분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팬들은 단순히 기뻐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만의 이야기를 또 하나 만들어냈으니까요. 데트풀과 울버린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하인즈 케첩과 하인즈 머스타드 병을 떠올린 겁니다. 단숨에 두 히어로의 밈이 되어 번져갔죠. 그리고 마침내 이 밈은 라이언 레이놀즈에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는 밈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하인즈에 먼저 협업을 제안한 겁니다.
Marvel Studios’ Deadpool & Wolverine – Can’t Unsee It / 출처: Marvel Entertainment 공식 유튜브
광고엔 실제 영화 장면이 등장합니다. 두 히어로의 모습에 케첩과 머스타드의 이미지가 중첩되죠. 그때 라이언 레이놀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건 잠재의식을 사용하는 광고보다 나쁘다. 매우 모욕적이다. 누군가는 크게 소송을 당할 거야.”
내레이션에도 데드풀의 익살스러움이 묻어납니다. 진지하게 하인즈를 광고하는 것이 아닌, ‘누가 내 영화 예고편을 망쳤지, 가만 안 둘 거야’하는 레이놀즈의 이야기. 그래서 광고는 더 잊히기 어려운 콘텐츠가 됩니다. 하인즈는 이 영화와의 협업을 기념해 두 히어로 버전의 케첩과 머스터드 병까지 만들었습니다. 팬들은 자신들의 밈이 이렇게 발전하는 것을 보고 더 큰 재미를 느꼈을 테고, 히어로와 가깝게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겁니다.
라이언 레이놀즈는 가장 익살스러운 히어로인 데드풀이자 광고 회사 Maximum Efforts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캠페인이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는 팬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야기를 적극 반영해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인즈에게도 데드풀과 울버린에게도 득이 되는 스토리인 것 같습니다.
스토리 부자의 올림픽
세상 다양한 브랜드 중 가장 많은 스토리를 가진 존재는 누구일까요?
Act 1: The Greatest Beginnings Live Here | Disney+ / 출처: Disney Plus 공식 유튜브
아마도 디즈니일 겁니다. 수많은 히어로가 등장하는 마블 시리즈부터 ‘겨울 왕국,’ ‘업,’‘라이온 킹’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오랜 팬을 거느린 스타워즈와 모험 이야기로 큰 흥행을 했던 인디애나 존스 등. 지구를 살리기 위한 스펙터클한 싸움이 있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한 나와의 싸움이 있고, 꿈을 지키고 이루기 위한 소중한 싸움이 있고. 모두의 행복을 찾기 위해 함께하는 싸움이 있고. 다양한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크고 작은 싸움들. 디즈니는 이 이야기들을 엮어 올림픽을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Act 2: The Greatest Journeys Live Here | Disney+ / 출처: Disney Plus 공식 유튜브
‘위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자 위대한 여정이 살아있고 위대한 도전이 있고 위대한 승리가 있고 위대한 엔딩이 있으며 위대한 스토리가 살아있는 곳.’
Act 3: The Greatest Challenges Live Here | Disney+ / 출처: Disney Plus 공식 유튜브
자막과 함께 이어지는 디즈니 플러스 콘텐츠의 장면들은 팬들의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선수들이 선사해 주는 감동과 희열, 짜릿함에 못지않죠.
Act 4: The Greatest Triumphs Live Here | Disney+ / 출처: Disney Plus 공식 유튜브
올림픽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기고, 멋진 ‘캐릭터’가 등장하는 무대입니다. 디즈니는 그들의 이야기가 올림픽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십분 활용해, 올림픽과 일맥상통하는 스토리를 꺼낸 겁니다. 결국 Disney+에 가입하라는 메시지이지만, 이렇게 근사하게 풀어낸다면 상업적인 콘텐츠라도 몇 번이고 돌려보고 싶을 듯합니다. 디즈니는 자신들이 어떤 보물을 갖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Act 5: The Greatest Endings Live Here | Disney+ / 출처: Disney Plus 공식 유튜브
나이키의 오늘의 스토리
올림픽과 가장 가까운 브랜드라면 누구나 나이키를 떠올릴 겁니다. 그만큼 스포츠맨십, 자신과의 싸움에 공을 들여왔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는 좀 더 대담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상대방을 존중하고 정의로운 스포츠맨십을 얘기해 왔다면, 올해는 자신감 넘치는 얘기를 꺼냈습니다.
경기에 집중하고 있으며, 치열하고 비장하고, 승리의 찰나를 맞이하기 직전의 위대한 선수들. 그들의 얼굴에 미국의 연기파 배우, 윌렘 데포의 목소리가 속삭입니다.
“나는 나쁜 사람인가?”
WINNING ISN’T FOR EVERYONE | AM I A BAD PERSON? | NIKE / 출처: Nike 공식 유튜브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 르브론 제임스를 필두로, 세레나 윌리암스, 폭발적인 스피드의 육상 선수 샤캐리 리처드슨, 레알 마드리드의 비니 주니어 등, 농구와 테니스, 축구, 육상을 비롯한 각 종목의 정상급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정상에 선만큼 오직 승리를 목표로 달리는 이야기를 시작하죠. 누구도 동정하지 않으며 이기적이고, 집착하고 맹렬하고. 만족하지 않으며 때론 비이성적이고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그러면 나는 나쁜 사람인가 묻는 그들. 나이키는 승리의 순간들을 보여주며, ‘승리는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강렬합니다. 여운도 남습니다. 판에 박힌 스포츠맨십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접근법. 윌렘 데포의 대담한 목소리는 캠페인의 임팩트를 더 강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캠페인에 대한 반응은 반반입니다. 누군가는 선수들의 끈기와 희생, 열정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승리의 가치를 잘 부각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반응도 적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경쟁을 부추기며 단순히 승리만 부각하고 있다고 거죠. 공정한 경쟁을 중요시하는 올림픽 스포츠맨십과 상충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금메달에만 박수를 보내지 않습니다. 은메달, 동메달은 물론 선수가 후회 없이 싸웠다면 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도 박수를 보냅니다. 나이키의 올림픽 콘텐츠는 ‘요즘’ 응원 트렌드와는 맞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일반인들의 자기와의 싸움을 보여주며,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라고 얘기하던 나이키의 여유로움은 사라졌습니다. 매출이 부진해서인지, 일반인 대신에 유명인들을, 자기와의 싸움보다는 상대와의 싸움을 좀 더 부각한 듯한 나이키. 나이키 측은 이 캠페인은 ‘선수들의 목소리, 승리를 위한 마음가짐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크리에이터의 입장에선 임팩트 완성도가 매우 높아 보이지만, 소비자로서는 좀 더 여유로웠던 나이키가 멋져 보이기는 합니다.
스토리를 활용하는 방법
영국 항공, British airways는 기내 안전 영상에 새로운 이야기를 입혔습니다. 넷플릭스에 스트리밍 돼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브리저튼.’ 이 드라마의 이야기를 영상에 차용한 거죠. 일명, ‘A British Original Period Drama.' 시대극에 맞게 19세기 영국의 귀족과 하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직원이 나타나 안전 지침을 얘기하죠. 이 영상은 실제 브리저튼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영국항공 직원 40여 명이 출연해 만든 영상입니다.
British Airways | Safety Video 2024 | May We Haveth One’s Attention / 출처: British Airways 공식 유튜브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감독인 셰론 맥과이어가 연출했으며, 의상은 오스카상을 세 번 수상한 바 있는 제니 비반이 담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19세기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습니다. 안전 영상은 기내에서조차 사람들이 잘 집중하지 않는 콘텐츠입니다. 하지만 이번 영상이라면 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보는 재미가 있는 데다 적재적소에 ‘자연스럽게’ 나타나 안전 지침을 얘기하는 장면은 유머러스하기까지 합니다. 브리저튼을 잘 활용한 브리티쉬 항공입니다.
많은 이들이 동시에 웃습니다. 같은 감동을 받습니다. 같은 기억을 추억합니다. 우리가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을 때 나오는 반응입니다. 스토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건 엄청난 일입니다. 하물며 브랜드가 소비자와 ‘스토리’를 공유하고 있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자산이겠죠. 팬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출발한 하인즈와 데드풀의 협업은 기발한 재미를 안겨주었고, 디즈니는 감동을 증폭시켰습니다. 나이키는 승리에 대한 또 다른 ‘대담함’을 선보였고요. 이야기는 좋은 자산이지만, 브랜드만의 이야기를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만의 스토리라는 좋은 자산을 활용한 브랜드는 이미 게임을 이긴 듯합니다.